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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남한산성 - 김훈

세실류 2018. 12. 29. 22:11

2017년 3월 6일

남한산성 - 김훈





소설가 김훈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에 참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 같다. 뭐랄까, 책의 서문에서부터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애국심, 보다는 애정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그는 서문에서 “서둘러 작은 이야기를 지어서 내 조국의 성에 바친다.”고 했다. 조국에 성에 바쳐진 그의 문장은 뽐내지 않았지만 단단했고,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다.

소설의 내용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다시 직접 두 발로 걸어 나와 청나라에 투항하기까지의 약 40여일간의 기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작가가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인물은 청의 수장인 칸도, 그의 앞잡이인 정명수도 아닌, 바로 조선의 신료들이다. 소설에서 그들은 지극히 무능력하다. 그들은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고전과 명분의 권위 뒤에 숨기에 급급하다. 소설에서는 ‘말먼지’, ‘말들의 맞물림’, ‘말의 창궐’ 등의 표현을 통해, 관료들이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언쟁을 반복하는 모습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관념적인 ‘대의’만을 좇느라 현실의 민생을 돌보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을 외교적/군사적 실패로 몰아 넣었다.

반면 대장장이 ‘서날쇠’로 대표되는 민중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그리고 애정 어린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서날쇠는 말로써 다투는 것 이외에는 하지 않는 당시 관료들보다 훨씬 실질적으로 기여하였다. 전쟁에서 쓸 무기와 성 안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직접 만들었고, 성 밖으로 임금의 격서를 전하는 역할도 맡았다. 성을 지키기 위해 성벽 위에서 동상에 걸리고 얼어 죽는 것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다. 그들의 추위를 쫓기 위해 지급되었던 깔개는 다시 회수되어 말 먹이로 사용되었고 그 말들은 결국 먹을 것이 떨어져 한 마리씩 죽어 나갔다. 어떤 뱃사공은 어가를 산성으로 인도해 주고도 쌀 한 톨 받지 못했으며 도리어 죽임을 당했고, 전쟁 통에 미처 피하지 못한 여자들은 청진으로 끌려가 그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오히려 조선이 40일간이나마 필사적으로 버텨낼 수 있었던 건 그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작금의 상황에 대입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 나라에 미약하나마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그렇게 얻어낸 민주주의는 사사로운 욕심에 눈이 먼 정치인들에 의해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었다. 이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 사건들은 다시 한번 새로워 질 때임을 경고했지만, 정치인들은 이를 무시했다.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를 논하기 보다는 진영을 나누어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 급급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고, 비로소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민중은 ‘협동체 본래의 기반’이며, 실질적으로 역사를 움직이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역사의 기록은 이들 한 명 한 명을 기억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한편으로는 조금 마음 아픈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나라의 슬픈, 다소 치욕스러운 역사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칸을 비난하지도, 인조를 책망하지도, 조선을 동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러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현실에 대해 나지막하게 돌아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적 오점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어 어김없이 봄은 왔고, 역사는 이 나라에 또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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